지난달부터 였나? 그토록 좋아하던 tv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공허함과 한숨만이 가득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멀게 느껴지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태신앙으로 봐도 무방한 나이에 엄마 손에 이끌리어 나간 교회, 그리고 “큰” 방황없이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은 극히 드물었다. 왠지 예수님을 생각하면, 나의 구세주라기 보단, 과거 속에서 소환해야 되는 인물로 다가왔다.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하나님과 성령님보다 익숙하거나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였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예수님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고르려다, 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끝, 예수의 시작.” 현재 나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 읽기 시작했고, 얼마되지 않아 “끝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문장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끝, 나의 밑바닥.’ 최근 들어 매우 지독하게도 경험하고 있다. 그 전까지 나의 끝에 다다르게 한 요소는 환경적이었다면, 지금 나의 끝은 철저하게 나의 연약함을 마주보고 있다. 그 연약함에 짓눌려 날마다 실패만을 거듭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처절하다. 눈물은 마치 예약이라도 한 듯 매일 밤 찾아온다. 그저 한숨과 눈물 섞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내게 책에서 한 번 더 사실을 직시하게 해 준다.
“죄에 직면해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역설적이다. 마치 지금 내가 최고의 상황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데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그동안은 이 연약함을 나를 누르고 있는 짐으로만 여겼다. 이것만 없어도 훨씬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러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이것 때문에 힘들어야 할까?’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이 있듯이,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 연약함은 비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연약함 안에는 분명 희망의 씨앗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언젠가 그 씨앗은 반드시 움트고 싹이 돋을 것이다. 그리고 머잖아 장성한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1:4-5절의 말씀처럼, 이 연약함을 통해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지금 겪는 이 슬픔은 오롯이 기쁨과 감사의 뿌리를 내리는 배양분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나의 스토리는 ongoing이다. 해결된 줄로만 알았던 것이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게 덮쳤고 그 거센 동력에 바로 휩쓸려 버렸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고 한다. 그 주변은 처참히 파괴되고 있지만 그 중심은 잠잠하다. 밑바닥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태풍의 눈에 들어온 느낌이 아닐까? 혼란하고 혼잡하고 혼탁한 상황에서 혼미한 상태에 있는 내게 예수님은 걸어 오신다. 아직까지는 안개가 껴 있는 것 같고 그 형태가 잘 보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희망의 평안함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언제 또 느닷없이 불어 닥치는 폭풍에 다시 휩싸이게 될까봐 하는 불안감도 여전히 있다. 그렇지만 그것마저 인정한다. 내 머릿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모든 불안정한 생각들, 요동치는 감정들을 모두 털어 놓는다. 그렇게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을 한 발짝씩 내딛어 본다.